Overview

Dataset statistics

Number of variables6
Number of observations25
Missing cells0
Missing cells (%)0.0%
Duplicate rows0
Duplicate rows (%)0.0%
Total size in memory1.4 KiB
Average record size in memory56.3 B

Variable types

Numeric1
Categorical3
Text2

Dataset

Description구간정보 번호,제목,소개,위도,경도
Author서울특별시
URLhttps://data.seoul.go.kr/dataList/OA-21249/S/1/datasetView.do

Alerts

타입 has constant value ""Constant
위도 has constant value ""Constant
구간정보 번호 has unique valuesUnique
제목 has unique valuesUnique
소개 has unique valuesUnique

Reproduction

Analysis started2024-05-18 07:27:43.778446
Analysis finished2024-05-18 07:27:45.560824
Duration1.78 second
Software versionydata-profiling vv4.5.1
Download configurationconfig.json

Variables

구간정보 번호
Real number (ℝ)

UNIQUE 

Distinct25
Distinct (%)100.0%
Missing0
Missing (%)0.0%
Infinite0
Infinite (%)0.0%
Mean13.16
Minimum1
Maximum27
Zeros0
Zeros (%)0.0%
Negative0
Negative (%)0.0%
Memory size357.0 B
2024-05-18T16:27:45.733293image/svg+xmlMatplotlib v3.7.2, https://matplotlib.org/

Quantile statistics

Minimum1
5-th percentile2.2
Q17
median13
Q319
95-th percentile25.4
Maximum27
Range26
Interquartile range (IQR)12

Descriptive statistics

Standard deviation7.6358802
Coefficient of variation (CV)0.58023406
Kurtosis-1.0214509
Mean13.16
Median Absolute Deviation (MAD)6
Skewness0.12310692
Sum329
Variance58.306667
MonotonicityStrictly decreasing
2024-05-18T16:27:46.022438image/svg+xmlMatplotlib v3.7.2, https://matplotlib.org/
Histogram with fixed size bins (bins=25)
ValueCountFrequency (%)
27 1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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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1 1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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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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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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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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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8 1
 
4.0%
Other values (15) 15
60.0%
ValueCountFrequency (%)
1 1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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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3 1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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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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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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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
4.0%
10 1
4.0%
ValueCountFrequency (%)
27 1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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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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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21 1
4.0%
20 1
4.0%
19 1
4.0%
18 1
4.0%
17 1
4.0%
16 1
4.0%

타입
Categorical

CONSTANT 

Distinct1
Distinct (%)4.0%
Missing0
Missing (%)0.0%
Memory size332.0 B
NEARBY
25 

Length

Max length6
Median length6
Mean length6
Min length6

Unique

Unique0 ?
Unique (%)0.0%

Sample

1st rowNEARBY
2nd rowNEARBY
3rd rowNEARBY
4th rowNEARBY
5th rowNEARBY

Common Values

ValueCountFrequency (%)
NEARBY 25
100.0%

Length

2024-05-18T16:27:46.327553image/svg+xmlMatplotlib v3.7.2, https://matplotlib.org/
Histogram of lengths of the category

Common Values (Plot)

2024-05-18T16:27:46.620190image/svg+xmlMatplotlib v3.7.2, https://matplotlib.org/
ValueCountFrequency (%)
nearby 25
100.0%

제목
Text

UNIQUE 

Distinct25
Distinct (%)100.0%
Missing0
Missing (%)0.0%
Memory size332.0 B
2024-05-18T16:27:46.962043image/svg+xmlMatplotlib v3.7.2, https://matplotlib.org/

Length

Max length15
Median length11
Mean length6.24
Min length3

Characters and Unicode

Total characters156
Distinct characters82
Distinct categories3 ?
Distinct scripts2 ?
Distinct blocks2 ?
The Unicode Standard assigns character properties to each code point, which can be used to analyse textual variables.

Unique

Unique25 ?
Unique (%)100.0%

Sample

1st row경희궁
2nd row덕수궁
3rd row운현궁
4th row종묘
5th row창경궁
ValueCountFrequency (%)
경희궁 1
 
2.9%
안중근 1
 
2.9%
역사박물관 1
 
2.9%
정동교회 1
 
2.9%
1
 
2.9%
러시아공사관 1
 
2.9%
남산골 1
 
2.9%
한옥마을 1
 
2.9%
의사기념관 1
 
2.9%
기념관 1
 
2.9%
Other values (25) 25
71.4%
2024-05-18T16:27:47.536964image/svg+xmlMatplotlib v3.7.2, https://matplotlib.org/

Most occurring characters

ValueCountFrequency (%)
35
22.4%
6
 
3.8%
4
 
2.6%
4
 
2.6%
4
 
2.6%
4
 
2.6%
3
 
1.9%
3
 
1.9%
3
 
1.9%
3
 
1.9%
Other values (72) 87
55.8%

Most occurring categories

ValueCountFrequency (%)
Other Letter 118
75.6%
Space Separator 35
 
22.4%
Decimal Number 3
 
1.9%

Most frequent character per category

Other Letter
ValueCountFrequency (%)
6
 
5.1%
4
 
3.4%
4
 
3.4%
4
 
3.4%
4
 
3.4%
3
 
2.5%
3
 
2.5%
3
 
2.5%
3
 
2.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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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 values (69) 82
69.5%
Decimal Number
ValueCountFrequency (%)
0 2
66.7%
1 1
33.3%
Space Separator
ValueCountFrequency (%)
35
100.0%

Most occurring scripts

ValueCountFrequency (%)
Hangul 118
75.6%
Common 38
 
24.4%

Most frequent character per script

Hangul
ValueCountFrequency (%)
6
 
5.1%
4
 
3.4%
4
 
3.4%
4
 
3.4%
4
 
3.4%
3
 
2.5%
3
 
2.5%
3
 
2.5%
3
 
2.5%
2
 
1.7%
Other values (69) 82
69.5%
Common
ValueCountFrequency (%)
35
92.1%
0 2
 
5.3%
1 1
 
2.6%

Most occurring blocks

ValueCountFrequency (%)
Hangul 118
75.6%
ASCII 38
 
24.4%

Most frequent character per block

ASCII
ValueCountFrequency (%)
35
92.1%
0 2
 
5.3%
1 1
 
2.6%
Hangul
ValueCountFrequency (%)
6
 
5.1%
4
 
3.4%
4
 
3.4%
4
 
3.4%
4
 
3.4%
3
 
2.5%
3
 
2.5%
3
 
2.5%
3
 
2.5%
2
 
1.7%
Other values (69) 82
69.5%

소개
Text

UNIQUE 

Distinct25
Distinct (%)100.0%
Missing0
Missing (%)0.0%
Memory size332.0 B
2024-05-18T16:27:48.049487image/svg+xmlMatplotlib v3.7.2, https://matplotlib.org/

Length

Max length1024
Median length699
Mean length754.76
Min length382

Characters and Unicode

Total characters18869
Distinct characters796
Distinct categories13 ?
Distinct scripts4 ?
Distinct blocks7 ?
The Unicode Standard assigns character properties to each code point, which can be used to analyse textual variables.

Unique

Unique25 ?
Unique (%)100.0%

Sample

1st row‘서울역사박물관 뒤편에 있는 궁궐’이라 부르는 경희궁. 조선 왕조의 이궁(離宮)이요, 조선의 5대 궁궐이라지만 여전히 무명(無名)이다. 풍모 또한 결코 그 위상과 같지 않다. 서울의 대표 도심인 신문로와 접한 터임에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기가 쉽지 않다. 하물며 경희궁의 터가 서울역사박물관을 아우를 만큼 너른 땅이었음을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경희궁은 1623년 광해군이 지었다. 건립 당시만 해도 230만 제곱미터가 넘는 부지에 1500칸에 이르는 대궐이었다. 광해군 이후 철종 때까지 이궁으로 사용했으며 전각만도 100여 동이 넘었다. 광해군이 경희궁을 지은 데는 사연이 있다. 경희궁은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집이었다. 하지만 그 터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말이 돌자 광해군이 이를 몰수해 궁궐을 지은 것이었다. 인조반정(1623)으로 광해군은 폐위되고 뒤를 이어 인조가 왕위에 올랐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수지리가 현실이 된 셈이다. 경희궁은 처음에는 경덕궁(慶德宮)이라 불렀으나 영조대에 이르러 지금의 이름인 경희궁(慶熙宮)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경희궁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가장 철저하게 파괴됐다. 일사늑약(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부터다. 학교를 세우기 위해 궁궐 내의 건물을 철거했고 이를 위해 땅의 지형도 바꿨다. 또한 경희궁 터의 8만2500㎡에는 전매국 관시를 지었고 전각들도 대부분 팔아버렸다. 초창기에는 회상전, 융복전, 집경당, 흥정당, 숭정전, 흥화문, 황학정 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 융복전과 집경당은 화재(1829 순조 29년)로 소실되고 나머지 전각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숭정전과 회상전은 조계사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황학정은 사직공원 뒤로, 흥화문은 박문사로 각각 옮겨졌다. 1988년 복원 작업에 착수한 후에야 몇몇 전각의 이전 작업이 추진됐다. 경희궁의 흥화문도 이때 이전 복원했다. 흥화문은 신라호텔의 정문과 똑같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기념한 박문사(博文寺)를 장충동에 지으며 절문으로 흥화문을 옮겨 사용한
2nd row덕수궁 돌담길은 이문세의 ‘광화문연가’로만 기억되지는 않는다. 조선조의 무수한 역사적 사건이 덕수궁에서 일어났다.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에 이른다. 덕수궁은 원래 그의 개인 저택이었다. 그가 죽은 지 104년이 지나 임진왜란(1592, 선조25)이 일어났다. 선조는 왜군을 피해 의주로 피란했고 한성의 궁궐은 모조리 불타버렸다. 선조가 돌아와 머물 곳을 찾다가 월산대군의 집에 행궁을 정하고 정릉동행궁이라 했다. 그때부터 비로소 궁궐의 역사가 시작됐다. 선조는 1593년 행궁에서 승하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 역시 행궁에서 즉위했다. 광해군은 창덕궁을 재건해 이전하면서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칭했다. 후에는 계모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유폐하고 서궁(西宮)이라 했다. 1623년에도 경운궁을 무대로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다. 인목대비와 서인들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仁祖)를 왕으로 추대한 인조반정이다. 인조 역시 경운궁의 즉조당에서 왕위에 올랐다. 인조는 왕이 된 지 8일이 지나 창덕궁으로 다시 이거했고 그 후로는 별궁으로 점점 노쇠해갔다. 1773년 영조 49년에 선조를 회상하며 사배례(四拜禮)를 치른 적이 있지만 궁궐로서 큰 역할은 하지 못했다. 경운궁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고종 때다. 고종은 아관파천(1896) 이후 러시아 대사관에서 환궁할 때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으로 향했다. 명성황후 시해의 현장인 경복궁을 뒤로하고 열강들의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해 대한제국(1897)을 세웠고 경운궁도 다시 궁궐의 위용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도 잠시 두 차례의 큰 화재를 겪으면서 부침을 겪었다. 하지만 그 또한 일제의 탄압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1905년 덕수궁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을사조약)이 체결되고, 2년 후인 1907년에는 고종의 강제 퇴위가 이뤄졌다. 순종은 왕위에 즉위한 후 창덕궁으로 이궁했고 고종이 기거하던 경운궁을 덕수궁이라 했다. 덕수(德壽)는 고유명사는 아니다. 태조가 정종에게 왕위를 계승한 후 정종은 태조의 거처
3rd row종로3가에서 낙원상가를 지나면 대로에 긴 한옥 담이 보인다. 담 너머는 조선 제26대 임금인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살았던 잠저(潛邸)인 운현궁. 흥선대원군의 사저로 조선 말 정치의 흥망성쇠가 깃든 유서 깊은 곳이다. 경복궁의 중건, 서원 철폐, 세도정치 개혁 등이 이루어졌으며 대원군의 섭정 10여 년 동안 사실상 조정(朝廷)과 같은 역할을 했다. 대원군이 권력에서 물러난 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곳으로서 역사적 상징성이 크다. 파란만장했던 조선 왕조 말기의 역사적인 현장인 셈이다. 정문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길게 늘어선 기와집이 보인다. 예전에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 업무를 맡은 이들이 거처했던 수직사(守直舍)다. 현재는 방 안에 화로?가구?호롱불 등의 생활용품으로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놓았다. 솟을대문 안쪽에는 노안당(老安堂)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추녀 끝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전형적인 한식 기와집이다. 흔히 볼 수 있는 단청이 칠해 있지 않아 기둥이나 벽면이 화사하지는 않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더 단아하고 정갈한 느낌을 준다. 노안당은 대원군이 사랑채로 사용하던 곳으로 민씨 척족의 세도 정치 아래에서 유배되다시피 은둔 생활을 했던 건물이다. 만년에 임종한 곳도 노안당의 큰방 뒤쪽에 있던 속방이었다.
4th row태조 이성계가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종묘를 지은 것이었다. 또 임금이 새로 왕위에 오르면 가장 먼저 종묘와 사직에 나아가 절을 하며 제사를 드렸다. 이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 왜병을 피해 피란길에 올랐을 때도 선조는 위험을 무릅쓰고 위패를 모셔 오도록 했다. 이처럼 왕의 위패를 모시고 제를 올리는 종묘는 조선의 역사에 더없이 중요한 장소였다. 종묘는 중국에서 비롯된 것이나 점차 우리 현실에 맞게 수용되면서 한국 고유의 특성을 간직한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단순한 구조의 재실을 길게 연결해 장엄한 엄숙미를 연출하며, 장식을 배제한 최소한의 공간 구성으로 제사 공간도 웅장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나도록 만들었다. 이곳에서 지내는 제사인 종묘대제(宗廟大祭)는 삼국 시대부터 있었던 국가적인 행사로 국가의 정신적 기둥이자 통치 질서의 기본이었다. 세계에는 많은 신전이 있지만 그 제례가 600년 이상 이어온 경우는 극히 드문데 일제의 침략과 한국전쟁을 치르면서도 제례를 지속한 가치를 유네스코도 높이 평가했다. 종묘제례는 197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었고 유네스코는 1995년 12월 9일 불국사, 석굴암, 해인사 팔만대장경과 함께 종묘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통치 기간이 길고 업적이 많은 왕의 위패는 정전(19실 49위)에, 나머지는 영녕전(16실 34위)에 각각 봉안되어 있다.
5th row한때는 창경원(昌慶苑)이라고 했다. 동물원이 있었고 식물원이 있었다. 1911년 일제에 의해 창경궁은 창경원으로 격하됐고 오랜 시간 유원지 역할을 했다. 가장 처절하게 훼손된 궁궐이 경희궁이라면, 가장 처참하게 변화한 궁궐은 창경궁이었다. 다행히 1983년부터 동물원을 이전하고 이름도 다시 창경궁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 창경궁이 지어진 지 꼭 500년 되던 해의 일이다. 창경궁은 1483년 성종이 경복궁과 창덕궁에 이어서 창덕궁의 동쪽에 세웠다. 그 기초는 세종이 닦았는데 세종은 즉위하던 해에 고려 남경의 이궁 터인 지금의 창경궁에 태종을 위해 수강궁(壽康宮)을 지었다. 성종은 세조 비 정희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 덕종 비 소혜왕후 등 세 명의 대비들을 위해 수강궁을 확장하면서 창경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창경궁에 있는 명정전과 문정전, 환경전, 경춘전 등 대부분의 전각이 이때 지어졌다. 창경궁은 자연스레 창덕궁과 이어졌으며 두 궁궐은 굳이 구분을 두지 않았다.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때 모든 전각이 소실됐고 광해군 8년(1616)에 재건했다. 이후에는 창덕궁이 조선의 정궁 역할을 하면서 창경궁의 쓰임이 늘어났다. 보통 궁궐은 남쪽에 정문을 세우지만 창경궁은 동쪽에 정문이 있는 것도 창덕궁과의 연계성을 고려한 배치인 듯하다. 그밖에도 기능과 용도 면에서 생활의 편의를 고려한 흔적이 많다. 하지만 1830년 환경전 화재로 내전들이 불탔고 1907년에는 일제에 의해 고종이 퇴위되고 순종의 거처를 창경궁으로 옮긴 후,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변질돼 일반에 공개하면서 궁궐의 권위가 추락했다.
ValueCountFrequency (%)
있다 51
 
1.2%
32
 
0.8%
19
 
0.4%
있는 16
 
0.4%
가장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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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4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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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13
 
0.3%
위해 12
 
0.3%
11
 
0.3%
Other values (3130) 4068
95.4%
2024-05-18T16:27:48.859444image/svg+xmlMatplotlib v3.7.2, https://matplotlib.org/

Most occurring characters

ValueCountFrequency (%)
4395
 
23.3%
503
 
2.7%
424
 
2.2%
. 385
 
2.0%
316
 
1.7%
295
 
1.6%
234
 
1.2%
215
 
1.1%
206
 
1.1%
202
 
1.1%
Other values (786) 11694
62.0%

Most occurring categories

ValueCountFrequency (%)
Other Letter 13015
69.0%
Space Separator 4395
 
23.3%
Decimal Number 652
 
3.5%
Other Punctuation 542
 
2.9%
Open Punctuation 87
 
0.5%
Close Punctuation 87
 
0.5%
Lowercase Letter 43
 
0.2%
Initial Punctuation 17
 
0.1%
Final Punctuation 17
 
0.1%
Math Symbol 6
 
< 0.1%
Other values (3) 8
 
< 0.1%

Most frequent character per category

Other Letter
ValueCountFrequency (%)
503
 
3.9%
424
 
3.3%
316
 
2.4%
295
 
2.3%
234
 
1.8%
215
 
1.7%
206
 
1.6%
202
 
1.6%
201
 
1.5%
195
 
1.5%
Other values (747) 10224
78.6%
Decimal Number
ValueCountFrequency (%)
1 167
25.6%
9 94
14.4%
0 85
13.0%
2 64
 
9.8%
3 48
 
7.4%
8 44
 
6.7%
7 42
 
6.4%
5 38
 
5.8%
4 35
 
5.4%
6 35
 
5.4%
Lowercase Letter
ValueCountFrequency (%)
s 8
18.6%
p 8
18.6%
a 8
18.6%
o 8
18.6%
m 6
14.0%
t 2
 
4.7%
g 1
 
2.3%
l 1
 
2.3%
k 1
 
2.3%
Other Punctuation
ValueCountFrequency (%)
. 385
71.0%
, 130
 
24.0%
& 11
 
2.0%
; 10
 
1.8%
? 4
 
0.7%
/ 1
 
0.2%
% 1
 
0.2%
Uppercase Letter
ValueCountFrequency (%)
N 1
20.0%
I 1
20.0%
O 1
20.0%
K 1
20.0%
S 1
20.0%
Space Separator
ValueCountFrequency (%)
4395
100.0%
Open Punctuation
ValueCountFrequency (%)
( 87
100.0%
Close Punctuation
ValueCountFrequency (%)
) 87
100.0%
Initial Punctuation
ValueCountFrequency (%)
17
100.0%
Final Punctuation
ValueCountFrequency (%)
17
100.0%
Math Symbol
ValueCountFrequency (%)
~ 6
100.0%
Other Symbol
ValueCountFrequency (%)
2
100.0%
Dash Punctuation
ValueCountFrequency (%)
- 1
100.0%

Most occurring scripts

ValueCountFrequency (%)
Hangul 12862
68.2%
Common 5806
30.8%
Han 153
 
0.8%
Latin 48
 
0.3%

Most frequent character per script

Hangul
ValueCountFrequency (%)
503
 
3.9%
424
 
3.3%
316
 
2.5%
295
 
2.3%
234
 
1.8%
215
 
1.7%
206
 
1.6%
202
 
1.6%
201
 
1.6%
195
 
1.5%
Other values (638) 10071
78.3%
Han
ValueCountFrequency (%)
10
 
6.5%
殿 5
 
3.3%
4
 
2.6%
4
 
2.6%
4
 
2.6%
3
 
2.0%
3
 
2.0%
2
 
1.3%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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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ng val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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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imple visualization of nullity by column.
2024-05-18T16:27:45.436124image/svg+xmlMatplotlib v3.7.2, https://matplotlib.org/
Nullity matrix is a data-dense display which lets you quickly visually pick out patterns in data completion.

Sample

구간정보 번호타입제목소개위도경도
027NEARBY경희궁‘서울역사박물관 뒤편에 있는 궁궐’이라 부르는 경희궁. 조선 왕조의 이궁(離宮)이요, 조선의 5대 궁궐이라지만 여전히 무명(無名)이다. 풍모 또한 결코 그 위상과 같지 않다. 서울의 대표 도심인 신문로와 접한 터임에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기가 쉽지 않다. 하물며 경희궁의 터가 서울역사박물관을 아우를 만큼 너른 땅이었음을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경희궁은 1623년 광해군이 지었다. 건립 당시만 해도 230만 제곱미터가 넘는 부지에 1500칸에 이르는 대궐이었다. 광해군 이후 철종 때까지 이궁으로 사용했으며 전각만도 100여 동이 넘었다. 광해군이 경희궁을 지은 데는 사연이 있다. 경희궁은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집이었다. 하지만 그 터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말이 돌자 광해군이 이를 몰수해 궁궐을 지은 것이었다. 인조반정(1623)으로 광해군은 폐위되고 뒤를 이어 인조가 왕위에 올랐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수지리가 현실이 된 셈이다. 경희궁은 처음에는 경덕궁(慶德宮)이라 불렀으나 영조대에 이르러 지금의 이름인 경희궁(慶熙宮)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경희궁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가장 철저하게 파괴됐다. 일사늑약(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부터다. 학교를 세우기 위해 궁궐 내의 건물을 철거했고 이를 위해 땅의 지형도 바꿨다. 또한 경희궁 터의 8만2500㎡에는 전매국 관시를 지었고 전각들도 대부분 팔아버렸다. 초창기에는 회상전, 융복전, 집경당, 흥정당, 숭정전, 흥화문, 황학정 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 융복전과 집경당은 화재(1829 순조 29년)로 소실되고 나머지 전각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숭정전과 회상전은 조계사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황학정은 사직공원 뒤로, 흥화문은 박문사로 각각 옮겨졌다. 1988년 복원 작업에 착수한 후에야 몇몇 전각의 이전 작업이 추진됐다. 경희궁의 흥화문도 이때 이전 복원했다. 흥화문은 신라호텔의 정문과 똑같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기념한 박문사(博文寺)를 장충동에 지으며 절문으로 흥화문을 옮겨 사용한37.592595129.066215
126NEARBY덕수궁덕수궁 돌담길은 이문세의 ‘광화문연가’로만 기억되지는 않는다. 조선조의 무수한 역사적 사건이 덕수궁에서 일어났다.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에 이른다. 덕수궁은 원래 그의 개인 저택이었다. 그가 죽은 지 104년이 지나 임진왜란(1592, 선조25)이 일어났다. 선조는 왜군을 피해 의주로 피란했고 한성의 궁궐은 모조리 불타버렸다. 선조가 돌아와 머물 곳을 찾다가 월산대군의 집에 행궁을 정하고 정릉동행궁이라 했다. 그때부터 비로소 궁궐의 역사가 시작됐다. 선조는 1593년 행궁에서 승하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 역시 행궁에서 즉위했다. 광해군은 창덕궁을 재건해 이전하면서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칭했다. 후에는 계모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유폐하고 서궁(西宮)이라 했다. 1623년에도 경운궁을 무대로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다. 인목대비와 서인들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仁祖)를 왕으로 추대한 인조반정이다. 인조 역시 경운궁의 즉조당에서 왕위에 올랐다. 인조는 왕이 된 지 8일이 지나 창덕궁으로 다시 이거했고 그 후로는 별궁으로 점점 노쇠해갔다. 1773년 영조 49년에 선조를 회상하며 사배례(四拜禮)를 치른 적이 있지만 궁궐로서 큰 역할은 하지 못했다. 경운궁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고종 때다. 고종은 아관파천(1896) 이후 러시아 대사관에서 환궁할 때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으로 향했다. 명성황후 시해의 현장인 경복궁을 뒤로하고 열강들의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해 대한제국(1897)을 세웠고 경운궁도 다시 궁궐의 위용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도 잠시 두 차례의 큰 화재를 겪으면서 부침을 겪었다. 하지만 그 또한 일제의 탄압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1905년 덕수궁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을사조약)이 체결되고, 2년 후인 1907년에는 고종의 강제 퇴위가 이뤄졌다. 순종은 왕위에 즉위한 후 창덕궁으로 이궁했고 고종이 기거하던 경운궁을 덕수궁이라 했다. 덕수(德壽)는 고유명사는 아니다. 태조가 정종에게 왕위를 계승한 후 정종은 태조의 거처37.592595129.066215
223NEARBY운현궁종로3가에서 낙원상가를 지나면 대로에 긴 한옥 담이 보인다. 담 너머는 조선 제26대 임금인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살았던 잠저(潛邸)인 운현궁. 흥선대원군의 사저로 조선 말 정치의 흥망성쇠가 깃든 유서 깊은 곳이다. 경복궁의 중건, 서원 철폐, 세도정치 개혁 등이 이루어졌으며 대원군의 섭정 10여 년 동안 사실상 조정(朝廷)과 같은 역할을 했다. 대원군이 권력에서 물러난 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곳으로서 역사적 상징성이 크다. 파란만장했던 조선 왕조 말기의 역사적인 현장인 셈이다. 정문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길게 늘어선 기와집이 보인다. 예전에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 업무를 맡은 이들이 거처했던 수직사(守直舍)다. 현재는 방 안에 화로?가구?호롱불 등의 생활용품으로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놓았다. 솟을대문 안쪽에는 노안당(老安堂)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추녀 끝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전형적인 한식 기와집이다. 흔히 볼 수 있는 단청이 칠해 있지 않아 기둥이나 벽면이 화사하지는 않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더 단아하고 정갈한 느낌을 준다. 노안당은 대원군이 사랑채로 사용하던 곳으로 민씨 척족의 세도 정치 아래에서 유배되다시피 은둔 생활을 했던 건물이다. 만년에 임종한 곳도 노안당의 큰방 뒤쪽에 있던 속방이었다.37.592595126.966504
322NEARBY종묘태조 이성계가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종묘를 지은 것이었다. 또 임금이 새로 왕위에 오르면 가장 먼저 종묘와 사직에 나아가 절을 하며 제사를 드렸다. 이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 왜병을 피해 피란길에 올랐을 때도 선조는 위험을 무릅쓰고 위패를 모셔 오도록 했다. 이처럼 왕의 위패를 모시고 제를 올리는 종묘는 조선의 역사에 더없이 중요한 장소였다. 종묘는 중국에서 비롯된 것이나 점차 우리 현실에 맞게 수용되면서 한국 고유의 특성을 간직한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단순한 구조의 재실을 길게 연결해 장엄한 엄숙미를 연출하며, 장식을 배제한 최소한의 공간 구성으로 제사 공간도 웅장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나도록 만들었다. 이곳에서 지내는 제사인 종묘대제(宗廟大祭)는 삼국 시대부터 있었던 국가적인 행사로 국가의 정신적 기둥이자 통치 질서의 기본이었다. 세계에는 많은 신전이 있지만 그 제례가 600년 이상 이어온 경우는 극히 드문데 일제의 침략과 한국전쟁을 치르면서도 제례를 지속한 가치를 유네스코도 높이 평가했다. 종묘제례는 197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었고 유네스코는 1995년 12월 9일 불국사, 석굴암, 해인사 팔만대장경과 함께 종묘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통치 기간이 길고 업적이 많은 왕의 위패는 정전(19실 49위)에, 나머지는 영녕전(16실 34위)에 각각 봉안되어 있다.37.592595129.066215
421NEARBY창경궁한때는 창경원(昌慶苑)이라고 했다. 동물원이 있었고 식물원이 있었다. 1911년 일제에 의해 창경궁은 창경원으로 격하됐고 오랜 시간 유원지 역할을 했다. 가장 처절하게 훼손된 궁궐이 경희궁이라면, 가장 처참하게 변화한 궁궐은 창경궁이었다. 다행히 1983년부터 동물원을 이전하고 이름도 다시 창경궁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 창경궁이 지어진 지 꼭 500년 되던 해의 일이다. 창경궁은 1483년 성종이 경복궁과 창덕궁에 이어서 창덕궁의 동쪽에 세웠다. 그 기초는 세종이 닦았는데 세종은 즉위하던 해에 고려 남경의 이궁 터인 지금의 창경궁에 태종을 위해 수강궁(壽康宮)을 지었다. 성종은 세조 비 정희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 덕종 비 소혜왕후 등 세 명의 대비들을 위해 수강궁을 확장하면서 창경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창경궁에 있는 명정전과 문정전, 환경전, 경춘전 등 대부분의 전각이 이때 지어졌다. 창경궁은 자연스레 창덕궁과 이어졌으며 두 궁궐은 굳이 구분을 두지 않았다.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때 모든 전각이 소실됐고 광해군 8년(1616)에 재건했다. 이후에는 창덕궁이 조선의 정궁 역할을 하면서 창경궁의 쓰임이 늘어났다. 보통 궁궐은 남쪽에 정문을 세우지만 창경궁은 동쪽에 정문이 있는 것도 창덕궁과의 연계성을 고려한 배치인 듯하다. 그밖에도 기능과 용도 면에서 생활의 편의를 고려한 흔적이 많다. 하지만 1830년 환경전 화재로 내전들이 불탔고 1907년에는 일제에 의해 고종이 퇴위되고 순종의 거처를 창경궁으로 옮긴 후,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변질돼 일반에 공개하면서 궁궐의 권위가 추락했다.37.592595126.966504
520NEARBY창덕궁창덕궁은 서울에서 두 번째로 유네스코 선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가장 먼저 종묘가 선정됐고 이어 창덕궁이 등재됐다.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이자 세계가 함께 보존하고 지켜가는 문화재다. 유네스코 선정 세계문화유산은 진정성과 뛰어난 보편적 가치를 전제로 한 10가지 조건 가운데 하나 이상을 충족시켜야 하는데, 창덕궁은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는 이유로 선정됐다. 창덕궁은 평지가 아닌 산자락에 지어진 궁궐로 전체 면적의 2/3가 북악산의 응봉산 자락에 있다. 산세를 적절히 활용한 궁궐인 셈이다. 창덕궁 후원의 가치가 각별한 이유도 이같은 자연의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가장 한국적인 건축과 조경의 특징이다. 창덕궁은 1405년 태종에 의해 세워졌다.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지어진 조선 왕조의 이궁(離宮)이었다. 하지만 조선 왕조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가장 오랜 시간 법궁(法宮)의 역할을 한 궁궐이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경복궁과 창덕궁을 모두 잃었다. 그 후 경복궁은 터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방치됐고, 광해군 2년(1610)에 재건된 창덕궁은 약 270년간 조선의 법궁으로 쓰였다. 이웃한 창경궁과 특별한 경계를 두지 않고 사용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조선 궁궐이 그렇듯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훼손됐다. 1917년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큰 화재가 발생해 내전의 대부분이 손실되고 말았다. 이에 일제는 창덕궁을 복원한다는 미명 아래 경복궁의 전각을 헐어서 사용했다. 경복궁의 강녕전(康寧殿)과 교태전(交泰殿)을 허물어 창덕궁의 희정당(熙政堂)과 대조전 등을 지었다. 창덕궁과 경복궁을 동시에 훼손시킨 것이다. 순종의 승하 이후에는 더욱 심하게 훼손됐다. 창덕궁은 1991년에 들어서야 복원사업이 진행됐다. 그리고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며 그 가치를 다시금 입증했다.37.592595126.966504
619NEARBY경복궁조선 왕조의 개국공신 정도전은 태조로부터 첫 번째 궁궐의 이름을 지으라는 명을 받았다. 개국 3년 만인 1395년 완공된 궁궐은 390여 칸으로 한양의 중심축에 자리했다. 풍수지리설에 입각해 등 뒤로는 주산(主山)인 북악산을 두었고 궁의 정면인 광화문 밖으로는 육조 거리를 두어 시가지를 만들었다. 그 앞쪽에는 안산(案山)인 남산이 있었고, 내수(內水)인 청계천이 흘렀다. 새 왕조의 권위를 상징하는 법궁(法宮)이 자리하기에 더없는 명당이었다. 그는 고심 끝에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로 경복궁(景福宮)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이름의 길한 기운 덕일까 새 왕조는 영욕의 시간 가운데 무려 600년이나 이어졌다. 다만 경복궁의 역사는 그러하지 못했다. 1553년 경복궁 강녕전(康寧殿)에서 첫 화재가 발생했다. 강녕전에서 시작한 불길은 근정전(勤政殿) 북쪽 대부분을 태운 후에야 잠잠해졌다. 하지만 이듬해 복구가 이뤄졌고 전소의 수준은 아니었다. 경복궁이 완전히 불타버린 건 임진왜란(1592년) 때 왜군의 소행으로 짐작한다. 전란이 끝난 후에는 그 터가 길하지 못하다고 해 창덕궁에게 법궁의 지위를 넘겨준 채 방치됐다. 경복궁이 되살아난 것은 그로부터 270여 년이 지난 1867년 흥선대원군에 의해서였다. 대원군은 330여 동, 7225칸 반의 경복궁을 중건함으로 왕권을 다시 세웠다. 하지만 이것이 조선 왕조가 이룬 경복궁의 마지막 영화였다. 1876년에는 대화재로 교태전 등 내전 다수가 손실됐다. 결정적으로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조선 최고의 법궁, 경복궁은 철저하게 해체됐다.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가 열려 전각의 90%가량이 철거됐고, 1917년에는 창덕궁에 화재가 일어나자 경복궁의 전각을 철거하여 창덕궁의 내전을 짓는 데 사용했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光化門)도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했고, 심지어 1926년에는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가 들어섰으며, 건청궁에는 미술관을 건립하는 등 경복궁 훼손의 방점을 찍었다.37.592595126.966504
718NEARBY보신각파루(罷漏, 오전 4시경)에 서른세 번의 종이 울린다. 도성의 아침이 밝는다. 그리고 인정(人定, 오후 10시경)에 다시 스물여덟 번의 종 소리가 들린다. 파루와 인정에 보신각 종이 울리면 도성의 문을 열고 닫았으며 백성들은 이를 신호로 하루가 저물고 밝았음을 알았다. 도성의 하루를 알리는 종은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도성에 걸었고 태종 13년(1413)에 종루를 종로 쪽으로 옮겼다. 지금의 보신각 종과 보신각도 원래부터 한 쌍이었던 것은 아니다. 보물 제2호인 지금의 보신각 종은 세조 14년(1468)에 주조됐다. 높이 3.18m, 입지름 2.28m에 달하는 대형 종이었다. 정릉사와 원각사를 거쳐 중종 31년(1536)에 남대문 안으로 옮겼고 다시 선조 30년(1597)에 명례동 고개로 이전했다. 광해군 11년(1619)에 폐사된 후에는 지금의 보신각 자리로 옮겨졌다. 현재의 보신각 역시 광해군 때에 지은 것이다. 이후에도 보신각에는 네 차례나 화재가 일었고 재건을 거듭했다. 원래는 종각이라 불렀으며 고종 32년(1895)에 보신각이란 현액이 걸린 후부터 지금의 보신각과 보신각 종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보신각은 한국전쟁 때 파손됐다가 1953년 복원했고 그 후 1980년에 종로로 복원했다. 지금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늠름한 기세를 자랑한다.37.592595129.066215
817NEARBY세검정서울 시내 한강으로 흘러가는 지류는 모두 14개다. 그 가운데 주변에 문화재가 유난히 많은 하천이 바로 홍제천. 이곳은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의 성문인 홍지문을 시작으로 이광수 별장 터와 석파랑, 세검정, 탕춘대 터, 조지서 터 등 물길 따라 역사도 유유히 흘러왔음을 말해준다. 홍제천 상류에 자리한 세검정은 인왕산,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도심 속 트레킹 코스의 종착점이자, 현대와 공존하는 조상들의 삶의 흔적이다. 세검정의 명칭 유래에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다. 가장 유력한 설은 1623년 인조반정과 관련이 있다. 이귀, 김류 등 반정군들이 홍제원에 모여 세검입의(洗劍立義?칼을 씻어 정의를 세움)의 맹세를 한 후 반정을 모의했다. 그리고 거사가 성공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검정을 세웠다는 주장이다. 그 모양은 정(丁)자형 3칸, 팔작지붕의 정자 형태이다. 기록에 의하면 1747년(영조 23)에 재건됐고 1941년 소실되었다가 1977년에 복원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한다. 홍제천이 흐르는 세검정 주변은 북악산 남쪽 기슭 백운대에서 이어지는 아름다운 경관으로 유명하다. 근래에는 평창동, 구기동, 홍지동, 부암동 등 세검정 주변의 고즈넉한 마을 분위기와 여기에 어울리는 카페, 레스토랑들이 들어서면서 새롭게 부상하는 서울의 명소가 되고 있다.37.592595126.966504
916NEARBY사직공원사직공원은 조선시대 역사의 시초를 가늠할 수 있는 공간이다. 조선시대 나라가 흉년에 들면 왕이 이곳에서 눈물을 흘리며 제사를 지냈다. 사직이라는 말에서 ‘사(社)’는 땅의 신이며 ‘직(稷)’은 오곡의 신이라는 뜻으로, 이들에게 제사를 올려 풍년을 기원했던 곳이 사직단이다. 조선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한 뒤 가장 먼저 조성한 것이 종묘와 사직단이었다니 그 역사적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사직단은 정사각형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가운데 동서남북으로 4개의 대문이 있고, 동쪽에 토지를 주관하는 신인 사(社)에게 제사 지내는 사단, 서쪽에 오곡을 주관하는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는 직단이 세워져 있다. 단 위에 돌기둥을 각기 세워 사와 직신을 배향했다고 한다. 사직단에서는 4개의 대제, 중제, 풍년기곡제, 기우제, 천신제, 고유제를 지냈으며 매년 9월 사직대제를 올린다. 사직단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물 제177호인 사직단 정문이 나온다. 이 문은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사직단으로 들어서는 첫 관문이다. 그 너머의 사직단은 정면 3칸, 측면 2칸, 건평 57.42제곱미터(약 17.4평)으로 단층 맞배지붕인데, 임진왜란 때 신실(神室) 등은 소실되어 선조 말년에서야 복원했고 여러 번에 걸쳐 수리했다. 신문(神門)은 1962년 도로 확장 공사 때 본래 자리에서 14미터 가량 뒤쪽으로 밀려났다. 가운데 2좌의 사직단을 두고 넓은 뜰을 가꾸어 토벽으로 둘러싸고 잡인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1단 높은 장대석기단(長大石基壇) 위에 정문을 세워 성지임을 표시했다. 사직단 뒤로 단군 시조를 모신 사당 단군 성전이 있고, 그 너머로 황학정(黃鶴亭)이 보인다. 황학정은 궁술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대한제국 고종의 어명으로 일제강점기인 1922년에 경희궁 회상전 북쪽에 있던 것을 궁술 연습을 위한 등과정이 있었던 자리로 옮겨왔다. 공원 안에는 종로도서관, 시립 어린이 도서관을 비롯한 몇몇 공공 건물이 있고, 울창한 숲이 조성되어 있어 사계절 내내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자 역사 체험 공간으로 사37.592595126.966504
구간정보 번호타입제목소개위도경도
1510NEARBY배제학당 역사박물관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기관이다. 배재학당 동관은1916년에 준공된 유서 깊은 근대건축물이며 2008년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근대 교육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소장품들과 함께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체험교실 및 세미나실 등을 갖추고 있다. 배재학당 명예의 전당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1875~1965), 한글학자 주시경(1876~1914), 시인 김소월(1902~1934)등 한국 근현대사에 큰 획을 그었던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한국 근대 체육의 초석을 다진 배재 체육의 면목도 확인할 수 있다. 배재학당은 이후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로 이어지며 무수한 인재를 배출하였다.37.592595126.966504
169NEARBY정동교회덕수궁 돌담길로 유명한 정동길은 서울의 유명 산책로 중에서도 유서와 관록이 스민 길이다. 봄과 가을의 낭만적인 정취 외에도 길 곳곳에서 수십 년에서 수백 년 된 세월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근현대사를 가로지르는 다양한 건축물들이 길을 따라 이어지기 때문이다. 덕수궁 돌담길을 끼고 쭉 올라와 모퉁이를 돌면 좌우로 정동극장과 서울시립미술관을 끼고 있는 아담한 교회가 눈에 들어온다. 정동길 한복판에서 100년 넘게 파란만장한 역사를 거쳐온 정동제일교회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이 교회를 세운 선교사 아펜젤러(1858?1902)가 주도해 추도 예배가 거행되던 곳이었고, 3.1운동 때는 예배당 마룻바닥의 지하실에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몰래 만들던 역사 현장이기도 하다. 나도향, 전영택 등이 작품 활동을 하고 주요 문학 동인지가 탄생한 무대이기도 하며 소설의 배경으로도 등장했다. 이토록 오랜 역사 속에 있었던 정동제일교회를 혹자는‘벽돌로 쓴 역사서’라고 부르기도 한다. 구한말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정동제일교회를 중심으로 한 정동길을 따라 일어났으니 이곳에서 근현대사를 탐방해볼 만하다.37.592595126.966504
178NEARBY구 러시아공사관고종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다. 이에 왕세자와 더불어 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 사건이 바로 아관파천이다. 고종은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하기까지 만 1년 가까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며 정사를 돌봤다. 구 러시아공사관은 바로 그 역사의 현장이다. 공간의 자취나 보존 상태보다는 그 역사성으로 인해 가치가 큰 공간이다. 구 러시아공사관은 원래 경운궁의 터로 건물이나 대지 면에서 당시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독일의 공사관을 압도했다. 고종은 아관파천 이전부터 서양 세력을 통해 일본을 견제하려 했는데 러시아공사관의 규모나 위치만으로도 러시아에 거는 고종의 기대를 엿볼 수 있다. 러시아공사관이 한러수호조약이 체결된 1885년 착공됐다는 사실도 이를 짐작케 한다. 지금도 구 러시아공사관 터에서 바라보면 당시의 기세를 짐작할 수 있다.37.592595126.966504
187NEARBY남산골 한옥마을충무로의 대로변에서 100미터 남짓 지나면 예스런 한옥마을과 자연 공원이 등장한다. 조선시대의 한옥 다섯 채를 이전해 조성한 남산골 한옥마을이다. 이곳에서는 어슬렁어슬렁, 양반의 팔자걸음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여전히 주거 역할에 충실한 북촌과 달리 사람이 살지 않아 민속촌의 느낌도 약간 묻어난다. 그럼에도 마을이 가졌음직한 풍유는 여전하다. 먼 발치의 남산과 N서울타워 아래 한옥촌을 휘감은 너른 자연은 절로 한자락의 풍류를 부른다. 예부터 학이 날아드는 &apos;청학(靑鶴)동&apos;이라 불렸을 정도로 풍경이 좋은 마을이다. 남주북병(南酒北餠)이라더니 그 말이 틀리지 않다. 조선시대 청계천 북쪽의 북촌에는 권력 있는 양반이 살았고, 남쪽의 필동 일대에는 권세와는 무관한 양반들이 뿌리를 내렸다. 그래서 북촌에는 떡이 맛있고 남촌에는 술이 향기롭다 했다. 당파 세력의 영향이기도 하겠지만 너른 자연을 보니 술과 풍류를 즐긴 남촌 선비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남산골 한옥마을은 그 정취도 충실하게 재현했다. 골짜기를 만들어 물이 흐르게 하고 전통 조경을 되살렸다. 마을 최고 상단의 망북루부터 청류정, 관어정까지 길목마다 자리한 정자도 전통미를 더한다. 그 너머로 남산이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 한층 운치 있다. 한옥촌이 전부라 생각하지만 정작 그 자연의 풍유 또한 진정 남촌답다.37.592595126.966504
196NEARBY안중근 의사기념관민족 투쟁의 대표적인 사건 중 1909년 10월 만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순간을 들 수 있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은 그 사건을 주도했던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기념관이다. 거사 이후 안중근 의사는 뤼순의 일본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1910년 3월 26일까지 옥중에서 유묵과 자서전을 쓰며 수십 점의 역사적 기록을 남겼다. 기념관에는 안중근 의사가 생중에 남긴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전체가 보물 569호로 지정된 안중근의사유묵(安重根義士遺墨)은 그의 우국충절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한다. 그 가운데는 여순 감옥에서 그를 존경해 따른 일본인 교도관에게 써준 보물 569-22호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 유묵도 있다. 그는 안 의사에게 감동받아 평생을 스승으로 모셨고 그의 후손이 1976년 안중근의사숭모회에 유묵을 기증했다. 죽음을 앞두고도 &apos;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apos;그의 애국심은 유묵의 손가락 잘린 손바닥 도장과 함께 가슴 뭉클한 감동을 안긴다. 안타까운 것은 그의 유품은 약 200여 점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지금까지 40여 점만이 발견됐다. 그밖에 안중근 의사 초상화와 관련 사진, 건국공로 훈장과 서한, 공판 당시 신문 보도 내용, 유명 인사 휘호 등도 전시되며 볼거리를 더하고 있다. 1970년에 세워져 사단법인 안중근 의사 숭모회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기념관 내부에는 안중근 의사 숭모회 사무실이 있어 안중근 의사에 대한 각종 유물과 자료를 계속해서 발굴, 수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매년 기념식과 학술 심포지엄, 애국순례, 서예 백일장 등의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37.592595126.966504
205NEARBY장충단공원겉보기에는 오랜 도심 공원이지만 민족 공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종이 을미사변 때 순직한 장병을 기려 쌓은 제단이 장충단(奬忠壇)이며,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이에 맞서다 순직한 홍계훈, 이경직 및 여러 신하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제사를 지냈다. 후에는 임오군란 때 죽은 이들의 제사도 함께 지냈다. 일제는 3.1 운동 이후에 민족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고궁과 역사 유적에 공원을 조성했는데 장충단공원도 그때 생겨났다. 그도 모자라 1932년에는 인근에 이토 히로부미 제사를 지내기 위한 박문사(博文寺)를 세우기도 했다. 공원을 걷다 보면 넓게 들어선 산책 마당이 보이는데 장충단비, 수표교, 승정전, 관성묘 등의 문화재를 비롯해 3.1 운동 기념비, 만해 한용운 시비와 유관순, 이준 열사, 김용환 선생 동상 등이 있다. 이 또한 장충단공원이 가지는 역사성과 무관하지 않다. 이밖에도 조선시대 인공 수로로 만든 수표교도 만날 수 있다. 인기 드라마 &lt;야인시대&gt;에 나온 다리로 유명하다. 우리 역사의 흔적이 많이 담긴 곳이어서인지 나라 꽃 무궁화도 자주 눈에 띈다. 장충단공원에서 여유로운 산책을 즐기며 역사도 함께 돌아보는 기회를 가져보길 권한다.37.592595126.966504
214NEARBY이화장대학로 뒤편에는 이화동이 있다. 이화동이라는 이름은 옛날에 배꽃이 아름답게 피는 곳이라는 데서 비롯되었다. 시간이 흘러 배꽃의 흔적은 아련하다. 이화동 한쪽에는 1700여 평의 이화장이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기거하던 집으로 지금은 이 전 대통령의 기념관을 겸한다. 이화장은 조선 중기 문신 신광한(申光漢)의 집터였으며, 정문 앞에는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석양루(夕陽樓)가 있었다. 광복 때 귀국한 이 전 대통령은 2년간 돈암정에 머물다 마포장을 거쳐 이화장으로 옮겨왔다. 1948년 7월 초대 대통령에 당선돼 경무대로 이사하기 전까지 살았으니,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관한 대부분의 업무가 이화장에서 이뤄진 셈이다. 이 전 대통령은 1960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이화장에서 한 달간 기거하다 하와이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하와이에서 생을 마감한 후에야 이화장으로 돌아왔고 국립묘지에 안치됐다. 현재 이화장은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과 사적관, 조각당과 생활관으로 이뤄져 있다. 대문을 지나면 사적관과 함께 이 전 대통령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1988년 8월 15일 건국 45주년 기념으로 세워진 동상이다. 맞은편 사적관에는 지금도 이 전 대통령의 생애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오간다. 사적관 우측 오르막에는 조각당이 있고 좌측 길 끝에는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과 생활관(비개방)이 있다.37.592595126.966504
223NEARBY성북동 최순우 가옥평생을 우리 것의 아름다움에 심취했던 미술사학자 혜곡 최순우 선생(1916~1984)의 옛집은 그의 생전 모습과 닮았다. 그가 1976년부터 작고할 때까지 살았던 성북동 고택은 옛 주인처럼 소박하지만 기품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포함해 평생을 박물관에서 한국미술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데 힘썼던 최순우 선생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로 더욱 유명하다. 그의 고택은 2004년부터‘혜곡 최순우 기념관’이 되었다. 한때 성북동에 양옥 바람이 불면서 헐릴 위기에 처한 이 집을 시민단체인 내셔널트러스트가 2002년 12월 8억원을 모금해 시민문화유산 제1호로 사들여 보수, 복원 작업을 벌였고 2006년에는 등록문화재 제268호로 지정됐다. 평생을 우리의 미를 알리는 데 헌신한 그의 업적을 기리고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가 집필된 이곳을 오래도록 보존하고자 함이었다. 매년 4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화~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공개되는 혜곡의 옛집은 겨울에는 문을 닫는다. 겨울마다 집을 청소하고 다듬어서 꽃피는 봄에 정갈한 모습으로 손님을 맞이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1930년대 지어진 전형적인 경기 지방의 한옥인 최순우 옛집은 ‘ㄱ’자형의 안채와 ‘ㄴ’자형의 바깥채로 된 ‘ㅁ’자형의 집이다. 안채와 대청, 사랑방에는 선생의 유품을 상설 전시한다. 창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한 사랑방은 그가 책을 읽고 글을 쓰던 곳이다. 생전에 사용했던 앉은뱅이 책상과 안경, 카메라, 육필 원고 등이 단정하게 놓여 있다. 아담한 안마당에는 우물과 함께 향나무와 소나무가 사이 좋게 서 있다. 뒤로 돌아 들어가면 꾸밈없는 자연미가 가득한 뒤뜰이 나온다. 꽃이 피고 나무에 연초록 새잎이 돋는 봄과 초여름, 옛집의 뒤뜰은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한다. 단풍나무와 대나무, 산수유나무, 감나무가 옹기종기 자리 잡고 돌확(돌절구) 등 옛 주인의 취향이 고스란히 담긴 소소한 물건들이 집 안 곳곳 도란도란 놓여 있다. 한편에 놓인 돌 의자에 앉아 차 한잔을 즐기며 계절의 운치를 만끽해도 좋다.37.592595126.966504
232NEARBY정릉북한산 등산을 다녀본 사람이라면 정릉이란 이름이 익숙하다. 등산 코스 중 한 곳인데, 산행을 위한 코스일 뿐 정작 정릉을 찾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넓은 대지에 능과 비석, 정자석이 대부분인 능들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 요소가 많지 않다. 정릉 역시 마찬가지다. 조그마한 능에 뭐 볼 것이 있냐고 하면 할 말은 없다. 그곳에는 역사가 잠들어 있다는 조금 식상한 답변밖에는, 역사를 모르고 가도 좋지만, 알고 찾아가면 더욱 좋다. 특히 정릉과 같이 역사의 변동에 따라 수많은 고초를 겪은 장소는 더욱 그렇다. 정릉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으로, 극진히 사랑했던 신덕왕후가 갑자기 승하하자 태조는 도성 안 덕수궁 뒤편에 능역을 조성했다. 강씨의 봉분 우측에 훗날 자신이 묻힐 자리까지 함께 마련하여 능호를 정릉으로 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릉에 시련이 닥친 것은 신덕왕후가 낳은 왕자인 방번과 방석이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살해되고 태조의 원비 신의왕후의 다섯 번째 소생 태종이 즉위한 이후부터다. 태종은 정릉의 능역 100보 근처까지 주택지로 정하여 정릉 숲의 나무를 베어 저택을 짓는 것을 허락했다. 청계천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이번에는 능의 석물 중 병풍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였다. 목재나 석재들은 태평관을 짓는 데 사용되었고, 신덕왕후 강씨의 능은 지금의 성북구로 이장했다. 지금도 정릉을 찾으면 그 빛바랜 흔적들을 확인할 수 있다.37.592595126.966504
241NEARBY삼청각삼청각이 담을 헐어낸 지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1972년 지어져 그해 남북공동성명 발표 때 대표단이 만찬을 열었던 장소로 1970~80년대에는 요정 정치의 산실이기도 했다. 그렇게 사람들의 시야에서 비켜 있던 삼청각은 1980년대 손님이 줄며 1990년대 중반 일반음식점으로 담을 헐어냈다. 그리고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서울시에 매입되며 전통한옥 문화공간으로서 한정식당, 라운지 & 와인 바, 공연장으로 또다시 모습을 바꾸었다. 본관인 일화당과 청천당, 천추당 등 5개의 별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방문객을 위한 정자 산책로가 마련되어 있다. 교통이 편리하진 않지만 주변에 30여 개의 외국 대사관저가 있고 북악산 등 주변 풍경이 좋아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 사진촬영 장소로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잘 손질된 각 별채의 정원은 아름다운 야외결혼식 장소로도 인기가 높다.37.592595126.966504